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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젊은날의 초상1

젊은날의 초상(1)

비갠후 징검다리 2009. 7. 23. 16:03

 

젊은날의 초상

 

아득한곳으로부터 나지막하지만 규칙적으로 그르렁거리는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번쩍이는 검은 철모를 눈썹이 보이지 않도록 눌러쓰고 어깨에 흰 휘장을 내려뜨린 두명의 건장한 헌병이 소총을 빗겨 두른체 절벅거리며 차안을 올라서는 것을 잠시 어색하게 보고 있었다. 구리빛으로 검게 그을린 헌병이 버스 앞쪽에서 절도있게 경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내가 푸른 제복의 군인이며 말단 휴가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창밖 가로수 사이로 철정검문소라는 명패를 스쳐보면서 나는 잠을 떨구어 내듯 자세를 반듯이 하며 습관처럼 우측손을 상의 주머니에 넣어 네모로 반듯하게 접어놓은 휴가증을 꺼내었다.

 

군데군데 군모를 눌러쓰고 잠을 자던 군인들도 다소 긴장하면서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부대를 출발하면서 치르는 세 번째의 검문이자 수도 서울로 진입하는 마지막 검문이다. 일반 승객들이나 운전기사도 일상처럼 무덤덤히 앉아있는 터라 버스안은 한여름날 적막한 시골동네와 같은 정적에 빠져있었다. 헌병들의 뚜벅이는 군화소리만 없다면 흡사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였다. 헌병들은 버스 뒤쪽에서부터 앞쪽으로 군인들을 훑어지나갔다. 나는 휴가증을 최대한 반듯이 펼쳐 보이며 면접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부동 자세로 앉아있었다. 헌병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있다는 듯 병사와 휴가증을 교대로 노려보며 버스앞쪽으로 나가서는 처음때와 마찬가지로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하고 버스에서 내려갔다.

 

잠시동안이지만 버스안은 검문으로 인해 약간의 생기를 되찾은 듯 했다. 계절의 여왕이라 칭하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5월의 풍경은 생명력으로 요동치고 날씨는 후덥지근 하다. 설악산을 다녀오는지 울긋불긋한 원색의 등산복차림과 생기발랄한 아가씨들의 싱그러운 모습도 가끔씩 눈에 띈다. 중대본부에서 휴가신고를 마치자 말자 병장에서 일병 말년까지 다양한 계급의 우리 일행은 이른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위병소 근처의 가게에서 김치찌개와 라면을 안주로 서너병의 고량주를 간단히 비웠고 원통정거장으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반주로 다시 몇병의 소주를 곁들였던 기억이 났다.나는 열흘간의 휴가를 얻은 자유인이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다는 여유로움이 새삼 만족스럽다. 당분간은 일상적인 아침 점호와 구보나 전투훈련이나 취침점호도 당분간은 남의 이야기이다.

 

버스는 소양강 줄기를 끼고 오랜 시간을 마치 산자락을 유영하듯 꾸준하게 질주했다. 신남을 지날무렵 군단 예하의 공병대 야외 훈련장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장애물설치, 장간 조립교 구축 현장에서 조립식 강철 구조물과 사투를 벌이던 동료들의 함성, 구보측정때 증기기관처럼 요란하던 심장의 요동과 검푸른 빛으로 도도한 소양강에서의 도하 훈련, 기름종이에 가래떡처럼 먹음직스럽게 포장된 다이너마이트와 크레모아속에 빼곡히 들어차서 차갑게 반짝이던 강철구슬들, TNT와 각종 지뢰들의 강렬한 폭발음과 각개전투교장에서 아득히 향수같이 진동하던 화약 내음들... 

 

온몸을 눅진눅진하게했던 훈련을 마친후에 땀과 먼지로 얼룩진 몸을 얼음같이 차디찬 계곡물로 말끔히 씻어 낼때의 그 짜릿하고 상쾌했던 순간 순간의 영상들이 마치 잘 편집된 한편의 기록영화처럼 차창으로 연속하여 잔상으로 맺히고 사라짐을 반복했다. 예비사단 신병 훈련소에서 춘천에 있는 103 보충대로 전입 올때는 소양호에서 이곳 신남까지 잿빛색으로 위장된 군용 철선을 타고 갑판위에 정좌로 도열한체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였다.

 

우리 전입병들은 계속되는 낯선 환경과 각양각색의 만남이 어색하여 서로 고개를 떨군체로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무채색으로 도색된 군용선은 벽체가 높아 높은 산의 둔덕과 푸른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규칙적으로 퉁퉁대는 엔진소리만 환청처럼 들렸었다. 야간열차를 타고 성북역에 내린후 군용트럭과 군용선박을 이용한 지리한 장시간의 이동과정은 무료하였다. 똑같은 복장으로 하나같이 구리빛으로 검게 그을린 우리들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병정인형 같았다. 장시간의 이동이라 두 끼니를 계속하여 전투 건빵으로 때워야 했으므로 야밤에 보충대로 이동하는 트럭 대열이 있는 선착장에 내릴때는 현기증과 공복감으로 더블빽의 무게에 휘청거렸었다. 따뜻한 오월의 햇살을 조명처럼 받으며 파아란 색의 직행버스는 온통 짙푸른 산야를 휘굽어 돌면서 질주하고 있고 나는 너무나 오랜만에 찾은 여유로움이 익숙치않아 원심력으로 휘청대는 몸을 추슬러 가며 군모를 깊이 눌러쓰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친구 박이 외박을 나와 있다고 연락이 닿았다. 카튜사로 복무중인 박은 나와는 다르게 미군 복장을 해서인지 조금 색다른 모습이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박의 제복입은 모습은 전보다 훨씬 사내다워 보였다. 그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대학교에서도 같은 학과를 지원했다. 평일이라 공원은 인적이 드물었고 화사한 자태로 도열한 라일락은 풍성한 향기를 내뿜고 온갖 수목들은 계절의 흥취를 못이기는 듯 제몸을 필요이상으로 짙푸르게 채색한체 파도같이 넘실대었다. 우리는 서로의 성장을 축하하고 만족해 했다. 커다란 잉어들이 유영하는 고즈넉한 연못을 굽어보는 벤취에 앉아 푸르른 신록과 오월의 싱그러움에 감사했다. 

 

우리는 열심히도 공학도의 설계를 해대었으며 부지런히 막걸리잔을 비워냈다. 정치판은 부도덕하고 최고권력자는 의례히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대열에 합류하여 연발로 터져 대는 최루가스에 캑캑 대기도했지만 비슷한 남루와 영양을 가진 우리는 만날 때 마다 서로의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때마다 분풀이 하듯 나는 테니스장에서 공을 후둘겨 대었고 기타줄이 끊어지도록 꽥꽥대며 노래를 불러 재꼈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일찍 포기한 상태였으므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학도로 포장한체 한푼의 등록금이라도 절약해야 했으며 틈이나면 공사판을 전전하거나 과외지도를 하는 등으로 근근히 학업을 꾸려 나갔다. 이성에 눈을 뜰 무렵에 우리는 여자친구와의 사귐에도 물질적인 풍요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과정마다 뼈저리게 느꼈지만 다행하게도 이 사회는 식어버린 커피한잔을 놓고도 서너시간을 충분히 버틸수있는 편안한 장소가 흔했으며 밤늦은 거리를 구두가 헤지도록 발품을 팔면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정처없이 거닌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젊음은 풍요로움이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감사했다. 그러나 인생에는 승패가 없다는 것을 몰랐던 젊은 우리들은 그 무모한 역동적인 대열속에서 열심히 뛰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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