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단편소설>/젊은날의 초상2

젊은날의 초상(2)

비갠후 징검다리 2009. 7. 23. 16:05

 

평일이기도 하지만 오전 나절을 막 지나서인지 공원은 쓸쓸하리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녹음이 짙어진 공원길을 그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 저런 말들을 이어나갔다. 박은 사람좋은 미소를 섞어가며 진심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버터와 김치 냄새가 믹스된 나의 현실에 자주 의문표를 던지게 되네...미군들과 같은 군복을 입고 미군들과 같이 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상대해야할 적들이 누구인지 문득 문득 헷갈려....우린 같이 자라왔지만 너는 국군이고 나는 미군으로 포장되어있고... 」

  

나는 대답할 마땅한 말을 찾기 어려웠다.나도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이 들때가 많다. 특히 우리 세대에 이상하게도 민감하게 다가오는 정치판의 행태는 더욱 의문 투성이로 비쳐진다. 정권 교체기마다 요란하게 치뤄냈던 민주화니 독재타도란 것도 역사 이래로 계속된 당파 싸움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던가...알량한 정치권력을 위해 온갖 잡당 패거리로 나뉘어 치부가 낱낱이 노출된 줄도 모른체 싸우다보니 우리 주권은 열강의 손아귀에 놀아났고 외군이 주둔하여 우리의 국방을 걱정(?)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삼분 사분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으니...

 

잉어들이 유영하는 평화로운 연못앞에 자리잡은 아담한 술집을 찾아들었다 나는 박의 잔이 바닥을 드러낼때마다 부지런히 잔을 채워 주었다.그리고 그의 말들이 부담스러워 말을 끊었다.

「선과악, 음과 양의 상존은 세상 순리이지. 모순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즐겁고 단순하게 살아가자.」

 

그는 미군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어학에는 많은 도움이된다고 했으며 졸업 후에는 해외 현장에 나가 큰 공사를 많이 경험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약간의 취기속에서 정갈히 미군 복장의 군복을 받쳐입은 박을 바라보면서 푸르른 하늘과 연못이 그득히 잠긴 그의 두 눈이 참 투명하다고 느꼈다. 문득 그와 함께한 젊은 날의 예사롭지 않은 비밀이 기록영화처럼 재생되기시작했다. 

 

여학생이 드문 공과대학 신입생 환영회에는 해마다 엄숙한 식순처럼 신입생들에 대한 매타작이 있었고 반 강제다시피한 한 바가지씩의 막걸리잔이 연속으로 돌려졌다. 취기로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후배들을 다독이며 동이틀때까지 이런 저런 얘기로 우리들과 함께했던 K선배는 그날이후 우리와 혈맹의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였다. K선배는 군복무를 대신하여 5년간의 중동 건설현장 파견을 자원했다.

 

퇴색한 플라타나스 잎새들이 맥없이 아스팔트 보도위로 소리없이 날리던 유난히 하늘이 파랗던 늦가을 어느날 우리는 운동장 옆에 위치한 방석집에서 그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한 송별회를 가졌다. 그날 우리는 늘 그러했듯이 많이도 마셨고 젖가락 장단에 맞추어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예쁘게 단장한 색시들은 술자리의 흥을 더하여 우리는 그나마 빈약한 재정상태가 파산 상태를 넘었음을 깨달은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 였다. K 선배를 귀가 시킨후 우리는 술값에 대하여 주인과 상의를 했으며 주인은 잔금을 치를때까지 볼모를 요구했다.

 

밝은 햇살이 중천에 걸릴무렵 나는 잠자리에서 깨어났다.

「더 주무세요.」

어제밤에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가씨였다. 그녀는 부지런히 화투패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술값을 치르지 못한 미안함과 어색함에 죄인처럼 묵묵히 그상황을 바라보았다.

「댁이 볼모로 잡히는 바람에 숙소로 갈수가 없었어요. 여기 규칙이 그렇거던요. 학교에 가셔야할텐데...」

  

나는 밤에 보았던 그녀의 화려하게 포장한 얼굴보다는 지금의 화장기 없는 모습이 훨씬 앳되고 청순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간단한 식사를 권하였고 나는 패잔병처럼 그녀가 시키는대로 따라했다.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알 수 없는 화투패 놀이를 무료하게 지켜보았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 형편상 일찌감치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했으며  꿈과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고했다.

「혹시 어제밤에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나요?」

그녀에게 새삼스레 안해도 무방할 것 같은 질문을 했다.

「아니에요. 모두들 좋으신 분이더군요. 저도 학교를 다녔으면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꿈도 키울수 있을 터인데 ....」

그녀는 외면했지만 우울함이 그림자처럼 얼굴 가득히 내려와 앉아있었다.

 

화투장을 돌릴때마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그녀의 젖가슴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젊은 사내의 본능이 강하게 꿈틀거렸고 몸이 화끈 달아 올랐다.    

「젖가슴이 참 예쁘군요.」

그녀의 건강하고 탄력있는 젖가슴을  만져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나는 밝은 해가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 보고있는 대낮이고 볼모로 잡힌 포로인 주제임에도 용감무쌍하게 그녀에게 어색한 제안을 했다. 그녀는 잠시 어정쩡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허락의 표시인듯 내게로 조금 다가 앉아와 주었다. 나는 그녀의 등뒤에서 손을 떨리듯 뻗쳐 분홍색 티셔츠 밑으로 소담스레 감춰진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조심스럽게 감싸안았다. 나는 미안하여 손에 힘을 줄수가 없었고 너무 긴장되고 부끄러워 그녀의 등뒤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머리결을 돌려 나의 입술을 찾았고 오랜동안의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리드할 줄 아는 프로였고 나는 서서히 내 자신이 그녀에게 아득하게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밝은 대낮과 젊은 우리는 너무도 잘 어울렸으며 나의 첫 동정은 전혀 예견치않은 상황하에서 깊은 계곡과 산야를 휘돌아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나는 태양이 작열하는 도도한 바다를 힘차게 유영하는 고래처럼 싱싱하게 펄떡거렸다. 그날의 술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우리는 공학도의 분신인 계산기나 비교적 고가의 전공서적들을 처분해야만 했다. 웬일인지 그녀의 꽃값은 계산에 누락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말을 전해야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가게를 나왔다.    

 

박의 귀대 시간이 가까워졌으므로  우리는 언덕아래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그가 탄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깔깔거리며 도로를 건너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곧 그녀들이 내 자신을 향하고 있으며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잠시 당황했다.

「군인아저씨. 죄송하지만 사진 한장 좀 찍어주시겠어요 ?」

영양 상태가 좋은 청바지 차림의 아가씨가 애교섞인 웃음을 흘렸다.

「술을 먹어서 제대로 찍을 것 같지가 않은데요...」

「찍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와 같이 사진 한 장만 찍혀달라고요.」

 

그녀가 가르키는 곳에는 단정히 머리를 뒤로 묶은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서있었다. 작은 체구지만 단정히 서있는 자세위로 얼굴은 부끄러운 홍조를 가득히 띄었고 싱그러운 오월 햇살아래 조그만 안경을 받치고 있는 콧망울에는 때 이른 땀방울이 송글거렸다. 청바지의 얘기인즉 자기들은 간호대학교 학생인데 해마다 오월 축제기간 중에 남자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한다고 했다.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는 아웃사이더인 관계로 작년 축제때도 제외되었으며 올해는 자신들이 의리상 나설 수밖에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상의 절반이 남자인데 모델이 그렇게도 없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사실 나도 애인이라고 칭할만한 여자 친구가 없었으니까. 그녀와 나는 몇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 중의 일부는 친구들이 강요하여 그녀를 둥그렇게 감싸안는 장면도 연출했다.

「너무 죄송해요.」

그녀는 정말 죄송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누가 누구에게 죄송해야 하는지 즐겁게 헷갈렸다. 나는 그녀의 홍조가 볼품없이 술기운에 불콰한 내 자신과는 품격이 다른 해맑은 오월 햇살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나는 매년 성탄절 무렵이면 소대 내무반에서도 애인과 같이 찍은 사진 품평회를 열며 그때마다 곤혹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진은 주실거죠 ?」

나는 빙글거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음 만남을 약속했고 헤어졌다.

 

도심거리의 고층빌딩 유리벽에는 붉은 낙조가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와 약속한 장소는 다운타운 개봉관 옆 2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어두운 현관에 들어서며 조용한 음악과 다양한 역광으로 첨색된 안온한 분위기가  참 좋다고 느꼈다. 안내된 자리에는 온몸을  붉게 물들인 양초가 요염한 자태로 얌전히 타고있었다.나는 긴장한 자세로 그녀를 기다렸고 웨이터가 가져다 준 찬물을 음미하듯 목구멍으로 넘겼다. 커텐같이 옅은 어둠속에서 그녀가 나타나 것은 잠시 뒤였다.

「오셨군요.」

그녀는 흰이를 들어내며 아름답게 웃고 있었고 손을 단정히 앞으로 모은체 가벼운 목례를 덧붙였다.

「빈손으로 다니시는가 보죠?」

나는 분위기와는 동떨어지게 대책없는 엉뚱한 질문을 해버린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예전에 유격훈련을 받을 때 조교로부터 마지막 구호를 외치지 않도록 반복하여 주의를 받았음에도 경망스레 행동함으로써 소대 전체를 파김치로 만든 당사자도 바로 요놈의 입이란 녀석 때문이 아니던가. 

「이 레스토랑에서 음악 DJ를 하고있어요. 아까 들어오실 때 부터 보고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외동딸이라고 했다. 시골에 있는 집안이 어려운 탓도있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학업에 대하여 절대적인 반대를 하는 탓에 일찍이 직업전선으로 진출이 가능한 간호학과를 선택 했다는 것과 학비에 보태기 위하여 자정까지 DJ 일을 한다고 했다. 그녀는 음악을 바꾸기 위하여 틈틈이 뮤직박스를 다녀왔다.

「많이 힘드시겠군요.」

나는 문득 내 처지가 그녀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시는 노래가 있으면 들려 드릴께요.」

「부대에 있다보니 세상 돌아 가는 것을 모르겠네요. 어떤 노래가 좋아요?」

처음 부대에 배치되던날 반합 뚜껑을 두드리며 “니기미 ×팔 원통땅 이다” “천도리 똥치” 등의 저속한 사가를 군가처럼 박자도 정확하게 맞추어 우렁차고 목청이 터지도록 열정적으로 불러제끼던 중대원들의 일사 분란한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어느덧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있는 나를 그녀가 안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 할지에 내심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사회 분위기가 가라앉아서인지 조용한 노래를 많이 찾더군요. 편지로 보낸 키스, 바람속의 먼지, 졸업의 주제가인 침묵의 소리, 스카브로우 추억, If you go away, 미안하다는 말은 하기어려워...」

그녀는 음악 소녀답게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 Dust In The Wind ”를 청했다. 아름다운 기타 선율을 타고 음악이 흐르는 동안 수준에 맞지않게 고뇌하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나는 나를 다시한번 엄숙히 위장하였다. 그녀가 건네준 사진속에서 수줍게 웃고있는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친숙해 보였다.

「우린 아직까지 서로의 이름도 나누지 않았군요.」

나의 말에 그녀는 후후 웃었다.

「전 이미 알고 있는걸요. 명찰에 써 붙이고 계시잖아요.」

그녀는 Y 라고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으므로 나를 선배님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단 한잔의 술도 마실 줄 몰랐다.그러나 역광속에 비치는 그녀는 아름다웠으며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틈틈이 대충 사랑해버릴까 하는 뻔뻔스러운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선배님과의 우연한 만남이 예견된 운명이 아닐까 느껴져요. 사실 남자를 안다는 것이 제게는 어울리지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우리들은 서로를  깊이 모름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외로움에 상대를 갈구하면서도 막상 상대가 접근하면 화들짝 놀라 도망가지요. 세상 이치가 상대방이 나를 깊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알맞은 거리에 두려고 하는 것 같아요. 결국 내자신이 미리 마음을 여는것도 상대방을 놀라게 할까 두렵고 또 타인의 일이 자신과는 상관없음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므로 상대방의 접근도 경계하게 되지요. 아군이 되는 것 보다는 적군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한 모순된 논리가 내게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어요.」

그녀는 말을 끊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촛불이 제몸을 힘차게 태워 밝아지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나는 경직된 자세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은 여자가 이미 알코올에 녹아 혀가 꼬부라든 남자를 정연한 논리로 설득하고 있는것이다. 더구나 내가 아직은 풋내기라고 생각한 그녀는 잘 무장된 논리로 견고한 자신의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내 자신은 무게있는 논리로 무장해본적도 없고 어떠한 주관도 가져 본적이 없지 않은가. 친구 박의 갈등과 이 여자 Y의 과제는 닮아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넘겨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줄기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용히 쓸어 넘기는 그녀를 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생각을 깊이 한다는 것은 내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고 또 그녀의 말은 상형문자처럼 복잡하게만 들렸다. 나는 문득 빙글거리듯 취기가 돌고 구토를 하고 싶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