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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젊은날의 초상3

젊은날의 초상(3)

비갠후 징검다리 2009. 7. 23. 16:08

밤새 나는 연병장을 헉헉대며 도는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나는 완전군장을 한체 반시계 방향으로만 돌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내려다 보며 고함을 쳤다.

「너는 왜 반대로만 도는거야 ? 세상은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게 순리인데 넌 왜 반시계 방향으로만 도느냐고 ?」

나는 어정쩡하게 나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느 누구도 시계방향으로 운동장을 돌수는 없어... 이게 규칙이야 !! 」.

그러나 나는 정말 그런 규칙을 누가 내게 지시했는지 모른다.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반시계 방향으로 운동장을 돌지 않았는가 ! 올림픽에서 조차도.. 그러나 왜 반시계 방향으로만 돌아야 하는지는 모른다. 

 

「깨셨어요 ?」

나는 형광등을 신문지로 가려 내쪽으로는 어둡게한 맞은편으로 Y가 단정히 책상에 앉아서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일 시험이 있어요.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술이 너무 많이 취해서 차마 보내드릴수가 없었어요. 사시는 곳도 모르고...주인 아주머니께는 친오빠라고 했는데 믿으시는 것 같지가 않네요....」

「시험이 있다면 만남을 약속하지 않았을터인데...」

나는 미안한 마음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자신도 학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시험기간에는 거의 날밤을 새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젊음의 낭만 따위는 나에게는 사치였고 넘보지 못할 영역이었다. 내가 가녀린 그녀의 힘겨운 생활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피해를 끼치고 있음에 정말 미안함을 느꼈다. 벽에 걸린 상병 계급장 군복과 그녀의 옷가지들은 어색한 풍경을 연출한체  우리를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 처럼...

「제 몫까지 마시게 했으니 미안한건 오히려 저예요.」

 이미 시계는 새벽녘을 가르키고 있어 나는 시험 잘 보라는 인사 치례를 하고 쫓기듯이 그녀의 자취방을 나왔다. 그녀는 나의 뒤늦은 귀가를 염려하며 배웅을 나와주었다.

「며칠후에 학교 축제가 있는데 허락 된다면 선배님과 함께하고 싶군요. 사귀는 사람도 없고...」

나는 어색한 작별 속에서도 그녀와의 만남이 계속되는 행운이 감사해서 보이지 않는 성호를 하늘에 그었다.

  

축제장소는 다운타운 근처에 있는 중급 호텔의 2층에있는 연회장이었다. 나는 비록 형님의 양복과 구두를 빌려 입고 신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파트너로서 의젓해 보이고자 노력했다. 일전에 본 그녀의 동료들은 나의 참석을 진심으로 축하했고 반가워했다.

쌍쌍의 젊음들은 모두가 싱그러웠다. 또래들로 구성된 보컬그룹들은 연주 중간 중간이 튀는 현상이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쉽게 느껴졌지만 헤파리처럼 몸을 일렁이며 음악을 쏟아내는 열정은 좌중의 환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간호대학이어선지 행사진행을 여학생들이 주도하여 남학생들은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광대처럼 춤추고 재롱을 피워야 하기도 했다. 전문강사가 지도하는 포크댄스 타임에는 나비처럼 나풀대는 그녀들은 공주였고 우리는 백마에서 금방 내린 왕자로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검은색 계통의 투피스를 단정히 차려입은 Y는 더이상 궁색한 자취생이 아니었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는 황금빛 카펫이 깔린 기역자로 꺽여있는 후미진 복도로 나와  땀을 식혔다.

「예쁘시군요.」

갑작스러운 조용한 환경이 어색하여 나는 한 개비의 담배를 꺼내 물면서 Y를 쳐다보지도 않은체 말했다.

「축제가 있다고 했더니 엄마가 옷을 사다 주셨어요. 예쁘게 보이라고 하면서 속옷까지요. 우리 엄마 재밌어...」그녀는 민망스레 웃었다.

「보고싶네요.」순간 나는 내 입술의 경망스러움에 당황했다. 보여달랄 것을 보여 달래야지.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나를 향해 성큼 한발짝 다가왔다. 눈을 꼭 감은 체. 그리고 윗도리 단추를 끌러 상의를 개방하였다. 푸른 바다빛 레이스가 달리고 어깨끈이 없는 투명한 감청색 옷 사이로 그녀의 봉긋한 우유빛 젖가슴의 일부가 드러났다. 순간 나는 그녀의 감청색 옷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에게 폭풍처럼 몰려드는 착각에 잠시 정신이 아득하였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엄마는 아빠와는 성격이 반대예요. 항상 자신의 억제된 삶이 내게서는 더 이상 연장되지 않기를 바라시죠. 엄마도 저와 같은 소녀 시절이 있었고 꿈이 있었겠지만 가난하고 구속된 세상살이에 모든 것을 묵묵히 포기하고 사시는 것 같아요. 엄마도 마음속에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많은 꿈이 있을 것 같은데....나는 내 자신이 풍요하거나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 엄마에게 죄짓는 것 같아 가능하면 내 자신을 억제하며 살고 있어요...」

 

호텔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검은 벨벳을 펼친것 같이 어두웠지만 하늘 가득히 파편처럼 별들이 총총히 박혀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그녀의 꿈을 이루기엔 나는 왕자가 아니었고 빌려온 양복과 구두속에 잠재된 내 실체는 그저 현실에 잘 적응하려고 하는, 틈만나면 현실을 도피하듯 술에 탐닉하는 한낮 가난한 병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더구나 그녀처럼 확고한 미래관이나 가치관을 가져 본적도 없다. 그녀는 가녀리지만 나름대로의 고뇌와 철학을 가지고 있고 또한 용기도 가졌다. 나는 한줄기 담배 연기를 길게 창밖으로 날렸다. 푸른빛의 연무는 나를 버리고 흡사 자유를 얻어 기쁜 듯 흐느적이며 청명한 밤하늘로 사라져갔다.  

 

그녀와 헤어지고 오는 길에 나는 강변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웬지 그냥집에 가서 잠드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다. 강을 길게 가로지른 콘크리트 교량위로 드문드문 차량이 스쳐 지나갔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간헐적으로 귓볼을 스치며 날아갔다. 도열한 가로등은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흔들렸고 둥그런 달과 달무리들도 강물에 투영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어둠 속에서 도시는 긴장한체 숨죽여 있었고 나는 어느덧 일상의 평범한 군중의 일부가 아닌 철학과 우주를 탐닉하는 도시의 순례자가 되어있었다. 밤하늘과 별, 가로등, 꿈, 바람, 사랑, 연인, 솜사탕, 바다와 파도... 나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한참을 뚜벅거리며 걸었다. 가로등과 가로수가  길게 도열한 거리에는 인적이란 없었고 한 대의 차량도 보이지않았다. 도시는 갑자기 숨죽이며 텅 비었다.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현실이 아닌 허상으로 와닿자 갑자기 한기처럼 밀려오는 그 무엇에 놀라 나는 화다닥 뛰기 시작했다. 나는 구보를 할때처럼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적막한 밤거리를 깨뜨리며 어둠속을 달려나갔다.

  

나는 형이 깰세라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옷을 벗었다. 그는 평화롭고 규칙적인 호흡을 하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형은 어려운 가정 형편을 도우려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월남 파병을 자원하였다. 야자수 나뭇잎을 배경으로 늠름하게 생긴 잘생긴 군인이 자동소총을 들고 찍은 사진이 올 때면 어머니는 아들을 먼 나라 전쟁터에 용병으로 보낸 것이 본인의 죄인양 울먹거렸고 행여 전투중에 사고라고 날까 주야를 기도와 묵상으로 지세웠다.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은 온몸이 진달래가 만개한것처럼 검붉은 반점으로 뒤덮히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정글은 피아 식별이 곤란하였고 내가 살아남아야 정의든 불의든 얘기할수있는 절박한 전쟁터였던 정글은 전투에 앞서 우선 극복해야 할 공포스런 상대였다고 했다. 비행기로 비오듯 퍼부어 댔던, 타는 듯한 무더위와 갈증속에서 하늘에서 쏱아지는 액체가 너무도 시원하여 두팔을 벌리고 온몸을 내맡겨 맞이했던 그 액체가 정글을 송두리째 말려 없애는 공포의 고엽제였음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고한다. 

 

귀대하던날 나는 Y를 기차역에서 만났다. 그녀는 비온 뒤 햇살에 반짝이며 시원스레 온몸을 휘날리는 한웅큼의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싱싱했고 짙어가는 녹음과도 닮아있었다.

「덕분에 즐거운 휴가를 보냈습니다.」

「항상 몸조심하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말고...」

그녀는 애써 내 시선을 피하여 눈을 돌렸다. 순백색의 정갈한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단정히 두손을 모은 체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나는 이 상황에서 어울릴 것 같은 멋있고 품위있는 말을 한마디도 준비하지 않은 내 자신의 준비 없음이 황당하고 부끄러워다..

 

그때 저멀리 곡선 레일을 휘돌아 플렛폼으로 미끄러지 듯 길게 기차가 들어왔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말없이 편지를 건네받으며 기차에 오른 나는 한마디도 못하는 내 입술의 직무유기에 기가 막혔다. 편지속에는 정갈히 쓴 편지와 더불어 그녀와 공원에서 찍은 몇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선배님께...

 
            언젠가 기차로 꾸민 찻집에 갔을 때 써본 습작이랍니다.
 
               늦은 오후
               산골 모퉁이에 있는
               기차로 꾸민 찻집에 앉아 있습니다.
               넓은 차창에 담긴 들판과 하늘은 푸르고 맑습니다.
 
               이 기차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찻집 처마에 매달린 풍경은 미동도 없습니다.
               찻집안의 사람들은 말을 낮추고 조심스레 얘기합니다.
 
              나는 이 적막한 풍경이 어색하고 생경하여
              서둘러 세상 속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를 몇번이나 망설였습니다.
            기차란 알지못할 이별과 아픔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선배님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잠시동안의 만남은 정말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몸조심하세요.
                    

 

 

기차가 길게 경적을 울리며 동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흡사 바람에 흘러 가는 듯 부드러웠다. 한마디의 약속이나 한마디의 몸짓이면 분명해질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잠기게 내버려두고 가는 내자신이 몹시도 미련스럽게 느껴질때 신음하듯 입술이 토해내는 한마디를 또렷이 들었다.

「사랑해....」

 

우리는 같은 처지였고 그녀는 분명한 아군이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기차에서 본 대지와 하늘의 푸름은 지금 움직이는 이 기차안에서 보는 풍경과 닮아있으리라. 나는 알수없이 고이는 눈물로 시야가 흐렸지만 빠르게 가속도가 붙어가는 이 기차 내부에서 와르르 빠져나와서 푸른 창공을 가득히 메운체 현란하게 유영하는 파랑새들을 오랫동안 덤덤히 지켜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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